2026.03.11 (수)

  • 구름많음동두천 7.1℃
  • 맑음강릉 11.1℃
  • 구름많음서울 7.4℃
  • 맑음대전 10.2℃
  • 맑음대구 12.1℃
  • 맑음울산 12.5℃
  • 맑음광주 11.5℃
  • 맑음부산 12.7℃
  • 맑음고창 10.2℃
  • 맑음제주 10.8℃
  • 구름많음강화 5.2℃
  • 맑음보은 9.6℃
  • 맑음금산 10.7℃
  • 맑음강진군 12.2℃
  • 맑음경주시 12.5℃
  • 맑음거제 11.0℃
기상청 제공

권영심 논설위원 칼럼] 진정한 조선인, 석호필

 

진정한 조선인,석호필

 

     권영심

 

한강토의 역사가 긴 시간을 이어져 오면서 자칫 그 정체성이 끊길 뻔한 위기가 수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 한강토가 불변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라고 본다.

 

이 땅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열망으로, 자신을 스스로 불태운 선조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반드시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없었던 역사,국가는 결국 사라져 갔다.

 

한강토의 역사에서 위기가 수없이 많았는데,가장 근래의 일을 말하자면 일제강점기를 결코 지나칠 수 없다. 36년의 시간은 어쩌면 한민족 특유의 유전자를 말살시킬 수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시간 동안 그들이 가장 집요하게 이루고자 했던 것은, 이 땅의 고유의 정체성과 유전자를 희석하고 없애고 말살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도 타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일제 와 같은 짓을 한 나라가 없다.

 

오히려 자국의 국민들과 섞이고 합해질 것을 두려워하고 철저히 분리하려고 애썼지,일제처럼 식민지를 자국과 같은 동일성을 가지도록 애쓴 나라가 없다. 조선인과 동일해지고자 그들이 얼마나 애썼는지를 시간이 지난 오늘날,우리는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천 가지는 들 수 있으나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의 혼과 맥이 이 강토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자신을 바친 진정한 조선인에 대해서이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온전한 조선인으로 함께 하며 목숨을 바친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석호필. 이 이름을 듣고 느낌이 오는 사람을 존경하고 싶다.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평생을 가장 조선인다운 사람으로 살았다. 본명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그래서 조선 이름이 석호필이다.

 

1889년 3월 15일 영국의 워릭셔주 럭비시에서 태어나 1970년 4월 12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향년 81세로 먼 곳으로 떠났다.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의 수훈자이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우리의 정부는 그를 현충원에 안장하고 훈장 을 수여했을까? 태어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의 흙이 되고자 원했던 석호필의 이야기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가슴에 지녀야 한다.

 

조선 망국의 주연 이완용을 기차에서 만났을 때,구원의 방법을 묻는 매국노에게 석호필은 벽안의 눈으로 차갑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신이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은 만날 수 있을지라도 이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죄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없소!"

 

영국에서 태어나서 케나다로 이민을 가서 수의학과를 졸업한 그는 어떤 계기로 조선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었을까? 세브란스 의대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의 부탁으로 조선으로 오게 된 석호필은 직장 동료인 이갑성을 만나서 운명이 바뀌었다.

 

그저 외국인 교수였고 소아마비의 불편한 몸으로 조선인에게 친근했던 석호필은 '수원에서의 일제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 를 쓰고 사진을 찍어서 해외 언론에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상해의 '차이나프래스'에 보도되어서 일제의 만행 을 세계에 최초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기미년 3월의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알았던 유일한 외국 인이었고, 그가 촬영한 기미만세의 필름은 독립군의 구두 밑창에 숨겨져서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되어 만천하에 알려졌다. 그는 독립을 외친 민간인들에게 가한,일제의 악독한 고문을 세계 에 알리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어디든지 다녔다.

 

일제의 암살 시도도 여러번 겪었으며 결국 케나다로 추방되었으나 그의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멈출줄 몰랐다. 일제는 그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석호필이 다시 한강토를 밟은 것은 해방이 된 뒤였다.

 

1959년에 한국에 영구 귀국한 석호필은 자신이 스스로 지은 석호필이란 이름으로 보육원과 젊은이들을 후원하면서 이 땅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케나다와 유럽에 있던 그의 지지자들이'스코필드기금'을 조성해서 그를 도왔고 그는 수의학자로서의 여러 공로도 많이 세웠다. 언제나 한국을 사랑했으며 사망 전의 그의 유언이 심정을 뜨겁게 물들인다.

 

"내가 죽으면 이 한국 땅에 묻어주고, 돌봐 오던 사랑하는 소년 소녀 가장들을 돌봐 주십시오."

 

먼 이국에서 태어났으나 이 땅의 사람이었던 석호필을 기억하며 우리 땅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대한외국인들에게,3월의 어느 날에 머리숙여 감사한다.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