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먹방'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뜨겁게 달구었던 '쯔양' 사건도 사실 먹방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점차 먹는 문제 라든가 먹는 것을 주제로 한 미디어가 발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많이 먹는냐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잘 먹는냐는 질적인 문제가 주요 주제다.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는냐 어떻게 해야 맛있는 음식이 되는냐, 어떤 음식이 건강식이냐가 주요 주제가 되는 시대다. 이런 흐름을 따라갈 때, 명리학 측면에서도 어떤 사주가 미식가(美食家)가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미식가 사주는 식상(食傷)이 사주내에서 길신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식상은 먹는 것과 관련 되어 있는 십신이므로 식상이 발달한 사람은 미각이 발달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상관 보다는 식신이 발달해 있는 사주가 미식가 자질을 갖추거나 요리사로서 대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 중에 미식가로서 평가할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소동파를 첫번째로 말하고 싶다.
소동파는 중국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학자이고, 정치가다.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본명이 아니고 호(號)다. 즉, 본명은 소식(蘇軾)이고 호가 동파(東坡)다. 소식(蘇軾)은 후세 사람들에게는 그의 본명 보다는 호를 따서 부르는 소동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중의 한 사람이다.
흔히 소동파라고 하면 적벽부(赤壁賦)를 떠올린다. 적벽부는 1082년 7월 16일에 쓰여진 전(前)적벽부와 10월 15일에 쓰여진 후(後)적벽부가 있다. 모두 소동파가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다가 황주로 귀양가서 지은 글들로 요즘 문학 장르로 말하자면 '에세이'다.
소동파의 20대는 영광과 슬픔이 함께한 시기였다. 과거에 급제한 영광이 있었고, 그 이면에 육친을 잃는 슬픔이 있었다. 그는 출중한 글 재주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과거에 급제 했다.과거시험을 볼 당시에 소동파의 글을 보고 당대 최고 문인이자 시험관이었던 구양수가 일부러 그를 장원 급제가 아닌 차석으로 합격 시켰다고 한다.
구양수는 소식의 과거답안을 보고 단번에 자신의 애제자인 소식의 글임을 알아차렸고 나중에 부정 시비가 일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소식을 장원이 아닌 차석으로 합격 시켰다는 야사가 있다. 그 만큼 소식(蘇軾)의 글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간 일생을 보면 외견적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은 귀양살이로 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는 '예부상서'를 역임할 정도로 출세한 인물임에 틀림 없으나 육친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내친 김에 소식(蘇軾, 소동파)의 일생을 잠깐 살펴 보면, 그는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喪), 부친상(喪), 아내상(喪)을 연거푸 당했다. 그의 20대는 주로 상(喪)을 치르면서 중앙과 지방을 오가는 시기였고, 하급 관리로서 세월을 보냈다. 이후 3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는데, 이 때는 마침 왕안석이 집권하여 부국강병책인 신법 운동을 펼치고 있는 시기라서 조정이 정쟁에 휩싸여 있던 때였다. 소식은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구법당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소식(蘇軾)이 무조건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 한 것은 아니었다. 급격한 개혁이 국정을 혼란 시킬 수도 있음을 우려했을 뿐이다. 소식은 구법당의 일원인 것은 맞지만 무조건 구법당의 의견에 찬성하지는 않았고 왕안석의 신법도 일부 내용은 존속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일종의 소신파 였다. 그 결과 소동파는 신법당에게는 미운털이 박히고 구법당에게는 외면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동파의 벼슬길은 험난했다. 대략 우리 나이로 65세 정도를 살았는데,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선 30대 이후 30여년의 세월들 중에 15년 정도는 벼슬을 하고 나머지 15년 정도는 귀양살이를 했다. 첫번째 귀양살이는 44세에 시작해서 9년 정도를 보내고 복권되었고 그 후 50대초에 잠깐 항주 지사를 지내고 다시 귀양살이를 했다.
일반적으로는 소식에 대하여 사람들은 적벽부를 주로 떠올리지만, 소식은 글 재주외에도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소식은 50대에 이르러 남송의 수도가 될 임안(지금의 항주)에 지사(知州)로 가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일반적인 행정가로서 업적도 훌륭했지만 이 시기에 요리로서 '동파육'을 직접 개발 했다. 소식은 황주에서 귀양살이 할 때에도 '식저육'이라는 요리를 개발한 적이 있다.
지금은 레시피가 알려져서 일반 가정에서도 동파육을 누구나 만들수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집에 가면 동파육은 매우 고급 요리에 속했다. 그리고 소식은 이 동파육 때문에 다시 해남(海南, 하이난)으로 가서 귀양 살이를 하게 된다. 동파육이 백성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았는데, 소동파를 시기하는 라이벌들이 '소식이 동파육을 만들어 강매하여 백성들을 착취한다'고 탄핵 했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해남으로 유배를 보냈다(1097년, 60세). 나중에 귀양이 풀려서 중앙으로 복귀하던 중 영면하게 된다.
대체로 사주에서 칠살격, 재격, 인수격 사주가 식상(食傷)을 상신으로 쓰게 되면 미식가의 자질을 많이 보인다. 식상을 상신으로 사용하면 빈민이나 백성을 구휼하는 일종의 복지정책에도 일가견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식상을 상신으로 쓰는 사람은 언변과 글재주가 탁월하다. 일종의 팔방미인이다. 소식의 경우가 그런 사례에 해당 될 수 있다. 아래에 보이는 사주가 소식(蘇軾)이다.
乙 癸 辛 丙
卯 亥 丑 子 (蘇軾)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丑월 癸수 생으로 천간에 인성 辛금이 투간하여 재성 丙화와 丙辛합한다. 지지로는 일시지가 亥卯합하여 乙목을 투간시켰으니 격국상으로는 칠살식제(七煞食制)격이 성립한다. 지지에서 亥卯합하여 乙목이 투간하였으므로 식신의 세력이 아주 좋다.
식신(食神)성이 잘 발휘되므로 미식가의 자질이 드러나고 글 재주가 남 다르다. 또 약자를 돌보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하게 나온다. 다만, 천간에서 丙辛합하여 부모의 덕(德)은 있으나 연(緣)이 없으며, 동시에 현모양처를 얻으나 처연(妻緣)이 짧다. 부부가 해로하기 어렵다.
또 식신이 매우 강성해서 자식과의 인연이 길지 않을 수 있는데, 소식(蘇軾)이 매우 긴 시간을 귀양살이를 했으므로 자식과의 불안한 인연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물상대체하는 효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간도 강하고 식신도 강한데 다만 칠살이 다소 약하다. 운에서 식상이 올 때 발복하고 재성이 오거나 정관을 보면 모두 대패(大敗)가 난다. 칠살식제격 사주는 대체로 그러하다. 이 사주도 3대운인 甲辰대운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4대운인 乙巳대운에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서서 발복한다.
그러나 5대운인 丙午 대운에 재성운을 만나니 이 때부터 귀양살이가 시작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50대에 잠깐 항주 지사가 되었으나 이는 대운의 영향이 아니고 세운에 의해서 길운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세운으로 인한 길운이 되면 그 기간이 매우 짧게 진행되는데 2-3년이 보통이다. 실제로 丙午대운에 항주 지사를 잠깐 했으나 이후 다시 해남(海南, 하이난)으로 유배를 가서 말년을 보낸다.
한 개인으로 볼 때, 사회적으로는 성공 했으나 육친적으로는 고독하고 고단했다. 누구보다 탁월한 재주와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 주지 않았고, 육친의 인연도 얇아서 여러모로 고독하고 외로웠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사주 전체적으로 칠살식제격이 아름답게 구성되어 보통 사람이 넘을 수 없는 귀격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