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 리 이광복 한식날이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고속 도로로 들어서자마자 전용 차로를 따라 휙휙 신바람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고향 부여로 성묘 가는 길이었다. 양지 바른 도로변 산기슭에는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다른 나무들 중에서도 몇몇 부지런한 녀석들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엷은 연둣빛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향의 아우들과는 10시 50분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우리 동기간은 4남 3녀 7남매로 ‘향기 복(馥)’ 자 돌림이었다. 나는 윤복(允馥), 둘째는 차복(次馥), 셋째는 선복(善馥), 넷째 막내는 계복(季馥)인데, 전원 우리 한산이문(韓山李門) 대종회가 정해 놓은, 즉 시조로부터 28세 항렬 ‘향기 복’ 자에 준거한 작명이었다. 4형제와 달리 3자매는 큰누님 연희(蓮姬), 둘째누님 채희(彩姬), 누이동생 옥희(玉姬)로서 그 이름에는 대종회 항렬과는 관계없이 임의의 돌림자인 ‘계집 희(姬)’ 자가 들어 있었다. 한산은 지금의 서천군에 속해 있었다. 나는 세 살 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로 출계했다. 종가인 큰집에 종통을 계대(繼代)해야 할 후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가의 무후. 그
“꾀꼬리” 이광복 시루봉 아래 시루메마을이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인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에는 우리 동네 시루메를 필두로 인근 십자거리, 마르디, 연화, 중락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인심 좋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이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석성(石城) 또한 삼국시대 이래로 유서가 깊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돌[石]로 쌓은 성[城]이라는, 즉 석성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에 돌로 축조한 옥녀봉 일대의 산성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석성은 본래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석산현(石山縣)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석성현으로 개칭한 이래 그 이름이 굳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공주목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고, 조선왕조 태종 때부터는 현감이 관아에 상주하면서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증산리의 증산은 시루메, 즉 ‘시루 증(甑)’ 자와 ‘뫼 산(山)’ 자를 조합한 한자 표기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동네 시루메 만을 딱 떼어 별도로 지칭할 때에는 원래의 증산리, 곧 증산리의 모체랄까 원조라는 뜻으로 특별히 ‘으뜸 원(元)’ 자를 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