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제25회 소래포구 축제가 지난 9월 28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축제장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은 수만 명에 달했고, 소래포구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화려한 불빛 뒤, 기자의 눈에는 씁쓸한 장면들이 남았다. 행사 시작 전, 취재진은 한 시간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며 준비를 마친 뒤 본무대 취재를 위해 장비를 들고 입장하려는 순간,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안전요원이 취재진의 출입을 가로막은 것이다. “기자입니다. 명함도 드리겠습니다.” 분명 신분을 밝히고 취재 목적을 설명했지만, 돌아온 답은 “아니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동구청 공무원과 남동문화재단 직원들은 그저 팔짱만 낀 채 ‘불구경’ 하듯 방관했다. 그 사이 정치인들과 구의원들은 아무 제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기자가 길 위에 10분 넘게 서성이며 항의해야 했던 상황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언론을 차별하고 홀대하는 구시대적 행태였다. 뒤늦게 한 관계자가 “네, 들어가세요”라는 허술한 허락을 내리면서 상황은 마무리됐지만, 남긴 상처는 깊다. 공공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이 언론 취재
뿌 리 이광복 한식날이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고속 도로로 들어서자마자 전용 차로를 따라 휙휙 신바람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고향 부여로 성묘 가는 길이었다. 양지 바른 도로변 산기슭에는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다른 나무들 중에서도 몇몇 부지런한 녀석들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엷은 연둣빛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향의 아우들과는 10시 50분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우리 동기간은 4남 3녀 7남매로 ‘향기 복(馥)’ 자 돌림이었다. 나는 윤복(允馥), 둘째는 차복(次馥), 셋째는 선복(善馥), 넷째 막내는 계복(季馥)인데, 전원 우리 한산이문(韓山李門) 대종회가 정해 놓은, 즉 시조로부터 28세 항렬 ‘향기 복’ 자에 준거한 작명이었다. 4형제와 달리 3자매는 큰누님 연희(蓮姬), 둘째누님 채희(彩姬), 누이동생 옥희(玉姬)로서 그 이름에는 대종회 항렬과는 관계없이 임의의 돌림자인 ‘계집 희(姬)’ 자가 들어 있었다. 한산은 지금의 서천군에 속해 있었다. 나는 세 살 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로 출계했다. 종가인 큰집에 종통을 계대(繼代)해야 할 후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종가의 무후. 그
인천은 물의 도시이다 권영심 지구별에 물의 도시라고 부름만한 도시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모르는 곳도 많겠지만 세계적으로 알려진 곳들을 몇 군데 꼽아보자면. 먼저 부다페스트가 있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수도이며, 동서유럽과 중유럽을 연결하는 흑해를 관통하는 다뉴브강이 있는 도시이다. 유럽 최고의 온천 도시이기도 한 부다페스트는 다뉴브의 진주 라고 불리운다. 다뉴브강은 도나우강이라고도 불리우며 유럽의 많은 곳을 흐르지만, 부다페스트만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며 흐르는 곳도 없다. 이 강과 온천이 부다페스트를 물의 도시라고 불리우게 만드는 것이다. 또 도시 전체가 운하로 이루어진 중국의 소주도 물의 도시이다. 소주미인이라고 예로부터 말하는데,중국의 어느 지방보다 풍부하고 맑은 물이,미인들을 태어나게 한다고 믿고 있다. 태국의 방콕 또한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죽는다할 만큼 강과 운하가 발달한 곳이다. 이탈리아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두 말이 필요없는 곳이기도 하다. 베트남에도 육지의 하롱베이라고 부르는 난빈이 있고 하노이도 물의 도시라고 불리운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에서 물의 도시라고 불리울만한 곳은 어디일까? 태곳적부터 한강토 삼 천리는 삼 면이 바다이기
“꾀꼬리” 이광복 시루봉 아래 시루메마을이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인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에는 우리 동네 시루메를 필두로 인근 십자거리, 마르디, 연화, 중락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인심 좋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이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석성(石城) 또한 삼국시대 이래로 유서가 깊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돌[石]로 쌓은 성[城]이라는, 즉 석성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에 돌로 축조한 옥녀봉 일대의 산성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석성은 본래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석산현(石山縣)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석성현으로 개칭한 이래 그 이름이 굳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공주목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고, 조선왕조 태종 때부터는 현감이 관아에 상주하면서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증산리의 증산은 시루메, 즉 ‘시루 증(甑)’ 자와 ‘뫼 산(山)’ 자를 조합한 한자 표기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동네 시루메 만을 딱 떼어 별도로 지칭할 때에는 원래의 증산리, 곧 증산리의 모체랄까 원조라는 뜻으로 특별히 ‘으뜸 원(元)’ 자를 붙여
당산(堂山) 이광복 우리 고향 원증산 마을에는 당산이 있었다. 시루봉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었다. 야트막한 그 야산에는 둥그렇게 세운 토담 벽에 볏짚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산제당이 있었다. 당산이라는 산명도 사실은 그 산제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산제당 언저리에는 왕소나무 몇 그루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당산 끝자락과 대식이네 뒤꼍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좁다란 샛길이 나 있었다. 산제당에서 멀지 않은 당산 너머 새뱅이 쪽 후미진 곳에는 상여집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몇몇 밭뙈기와 용보들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논배미들이 조각보처럼 올망졸망 흩어져 있었다. 용보들은 마을 앞을 지나면서 시루봉을 끼고 돌아 구례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종가의 후사, 즉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로 출계하여 자라난 양가는 앞재너머 말랭이 시루봉 들머리에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당산과 용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었다. 산제당은 나지막한 단칸 초막이었다. 주먹만 한 돌멩이와 깨진 사발 굽 따위가 듬성듬성 박힌, 볏짚 여물까지 뒤섞인 토담 벽 한쪽 모서리에는 대나무와 갈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덜렁덜렁하는 문짝이 달려 있었다. 대개 산제당이라면 산신을 모셔 놓고 산신각 또는 산신
[권영심 논설위원 기고] 지 나이 지가 먹어 놓고 어느 시대에도 나이 먹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물론 기근과 불가피한 자연재해로 예전의 인간의 수명은 지금의 반도 못 되게 짧았다. 그럼에도 장수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런 사람들조차 나잇값을 못 하면 냉대를 받거나, 심하면 부족에게서 축출되었다. 식량을 축내면서 나이만 먹는 것을 용서할 만큼 넉넉한 마을이나 부족은 없었다. 기로 속이 법제화가 되지는 않았으나 각 나라마다, 마을마다 겉으로 드러나 지 않는 기로 속이 존재했다.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연륜이 쌓여 생기는 현명함이었다. 그 현명함은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노하우였고, 때로 그것이 부족을 살리고 가족을 위험에서 구했다. 그래서 현명한 노인일수록 젊은이들은 공경했고 받들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노인의 현명함이 필요 없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며,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도 찾으면 다 알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경험도 전수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시대가 다른 세대의 가치관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간극이 있다. 그러니 노인 공경이나 존중을 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