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복 단편 소설 “당산(堂山)”
당산(堂山)
우리 고향 원증산 마을에는 당산이 있었다. 시루봉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었다. 야트막한 그 야산에는 둥그렇게 세운 토담 벽에 볏짚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산제당이 있었다. 당산이라는 산명도 사실은 그 산제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산제당 언저리에는 왕소나무 몇 그루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당산 끝자락과 대식이네 뒤꼍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좁다란 샛길이 나 있었다.
산제당에서 멀지 않은 당산 너머 새뱅이 쪽 후미진 곳에는 상여집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몇몇 밭뙈기와 용보들까지 이어지는 크고 작은 논배미들이 조각보처럼 올망졸망 흩어져 있었다. 용보들은 마을 앞을 지나면서 시루봉을 끼고 돌아 구례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종가의 후사, 즉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로 출계하여 자라난 양가는 앞재너머 말랭이 시루봉 들머리에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면 당산과 용보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었다.
산제당은 나지막한 단칸 초막이었다. 주먹만 한 돌멩이와 깨진 사발 굽 따위가 듬성듬성 박힌, 볏짚 여물까지 뒤섞인 토담 벽 한쪽 모서리에는 대나무와 갈대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덜렁덜렁하는 문짝이 달려 있었다. 대개 산제당이라면 산신을 모셔 놓고 산신각 또는 산신당이라고도 불렀지만, 우리 동네 산제당에는 산신도나 위패는 봉안되지 않았고, 마을 공동 제사 때 쓰는 각종 제기와 시루와 옹기솥만 보관되어 있었다. 제기는 광주리에 담겨 있었으나, 시루와 옹기솥은 나무로 깎아 만든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산신은 없고 제기만 존재하는 이 자그마한 토담집의 경우 엄밀히 말하자면 산제당이라기보다는 제기고(祭器庫)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까막눈인, 너 나 할 것 없이 논밭을 일구어 먹고사는 농민 일색인 동민들은 별 깊은 생각 없이 그저 산제당이라 불렀다. 하긴 동제를 당산에서만 올리는 것은 아니었다. 산신제는 당산에서 지냈고, 기우제는 시루봉에서 봉행했다. 산제당의 기물은 제사 때만 꺼내서 사용하는 마을 공동체의 공유 재산이었다.
지난번에도 밝혔다시피 원증산 마을은 본래 시루봉에서 질빵너머와 당산을 거쳐 도라무텡이까지 활처럼 둥그렇게 휘어나간 능선 안에 삐잉 돌아 형성돼 있었다. 앞재너머 말랭이에서 남쪽을 바라볼 경우 시루봉에서 신작로 쪽으로 뻗어나간 한 자락이 좌청룡, 질빵너머에서 잿무덤부리로 뻗어나가 신작로와 맞닿은 또 다른 한 자락이 우백호에 해당되었다. 그곳에는 윤구병씨네 집과 외딴집 두어 채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질빵너머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도라무텡이 쪽이 좌청룡, 시루봉 쪽으로 뻗은 줄기가 우백호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을 전체가 삼태기 또는 말발굽 같은 형국이었다. 어떻게 보면 새둥우리 같기도 하였다. 그 안에 여러 가구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원증산 마을의 중심이자 모체인 셈이었다. 우백호 쪽의 양가가 북향인 반면, 좌청룡 쪽의 친가는 남향이었다.
우리 원증산의 경우 비록 부촌은 아니어도 몇 대씩 내려오는 토박이들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인심 좋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더욱이 원증산에는 역사와 전통과 예의범절과 미풍양속이 있었다. 도라무텡이로 나가는 길목에 물 맛 좋고 수량 풍부하기로 유명한 오래된 우물이 있었다.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지하수가 샘솟는 우물이었다.
내가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다. 추운 겨울날, 원증산 주민들은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산신제는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동민 모두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체 제례 의식이었다. 집안에서 지내는 기제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차원 높은 제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신제에는 엄격한 법도와 절차가 있었다. 원증산의 제일(祭日)은 예부터 정월 초엿새날로 못박혀 있었다. 주민들은 섣달그믐날 마을 회의를 열었고, 구장(지금의 이장) 홍사철씨를 유사라 부르는 제관으로 선출했다. 홍 구장은 인품과 덕망이 뛰어난, 동네에서 가장 생기복덕한 인물로 산신제 주관의 적임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축관으로는 윤현중씨를 발탁했다. 그는 원증산 갑부 윤구병씨의 외아들이었다. 윤씨네 토지는 임야와 전답을 통틀어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우리 고장에서 그 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농토만 하더라도 문전옥답은 물론 구례들 고래실에다 태조산 태조봉 아래 전진바위 협곡 자갈논과 몽돌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말랭이 그 집 땅에 오두막집을 지은 양가의 (큰)아버지는 한 해 네 개의 품으로 텃도지를 물고 있었다. 우리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현물이 아닌 노동으로 텃도지를 바치기로 약조한 것이었다. 윤구병씨 부자는 도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우리는 그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윤현중씨가 축관으로 지명된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신제의 총괄 책임자인 홍 구장은 그날부터 예비 제관으로서의 근신에 돌입해 매일 냉수로 목욕재계하고 외출을 삼가는 가운데 일체 궂은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몸에 밴 일상생활을 절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내외간 동침을 피하고자 그의 부인은 저녁밥을 먹자마자 이웃집으로 마실 가서 따로 취침하고는 아침 일찍 귀가했다.
홍 구장은 가족 간에도 대화를 차단하기 위해 아예 광목천으로 입을 가리고 지냈다. 비린내 나는 음식을 피했고, 마당이나 댓돌 등 밖에 있다가 뭐든지 물건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부지깽이로 먼저 문을 톡 톡 톡 두들긴 뒤 방문을 열었다. 유사와 그 가족들이 지켜야 할 금도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초사흗날이었다. 어른들이 한지를 길게 엮어 말랭이에서부터 당산까지 금줄을 쳤다. 앞재너머 마을 입구, 당산 입구, 제관 집 대문과 앞재너머 이외의 마을 밖으로 드나드는 다른 길목에도 왼새끼 금줄을 치고 좌우로 황토 세 무더기를 다문다문 놓아 산신제 개시를 고지하는 한편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때부터 모든 이의 왕래가 금지되었다. 객지에 나갔던 사람은 산신제가 끝나야 마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고, 동네 안에 머무는 사람들 또한 산신제가 종료되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방문객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구네 집에 손님으로 왔다 하더라도 산신제가 막을 내리기 전에는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동민들은 산신제 기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다. 살생과 출혈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가축의 도살을 금하는 것은 물론 행여 손가락이라도 다쳐 피를 흘릴까 봐 산으로 땔나무 하러 가는 것까지 자제했다. 모두가 심신을 정결하고 경건하게 유지하느라 애썼다.
주민들은 미리 샘물을 길어다 두멍 가득 식수와 생활용수를 충분히 챙겼고, 동네 우물을 모두 품어 바닥까지 박박 긁어낸 뒤 산신제에 사용할 최고의 정화수를 확보하기 위해 철저히 대처했다. 둥그런 우물 난간에 막대기로 얼개를 만들어 올려놓고는 그 위에 맷방석을 덮어 산신제에 쓸 물을 취하기 이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우물에 손을 댈 수 없게끔 엄중히 방비했다.
홍 구장 내외는 동민들이 십시일반 갹출한 금품으로 주과포혜(酒果脯醯) 등 제수 장만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가장 기본적인 제물은 백설기 석 되 세 홉, 삼색실과, 메, 쇠고기 산적, 어포, 미역국, 식혜, 탕 등이었다. 그중에서 떡과 메, 탕 등 일부 음식은 산신제 당일 제관이 당산 산제당 앞에서 직접 지어 올리는 것이 오랜 관행이었다.
마을 회관이 생기기 훨씬 이전, 식구가 단출하면서도 말랭이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집에는 각종 동네 공용 물품들이 보관돼 있었다. 두레 때 쓰는 농기(農旗) 깃대는 집 뒤꼍 윗방과 아랫방을 가로지르는 처마 밑 ‘뜰팡’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고, 장끼 꼬리털로 연출한 기꼭지를 비롯하여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일곱 글자가 크게 들어간 기폭은 차곡차곡 접힌 채 나 혼자 쓰는 공부방에 잘 간수돼 있었다.
꽹과리 징 장구 북 따위의 풍물들은 물론 돌모와 버꾸에다 벙거지까지 있었다. 긴 나팔과 새납은 물론이고, 삼지창(三枝槍)을 곧추세워 위엄이 넘치는 깃대하며 푸른 비단 기폭에 붉은색으로 ‘令’ 자를 수놓은 영기(令旗)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옛 군영을 연상케 하는 창인(槍刃) 깃대와 창(蒼) 백(白) 적(赤) 흑(黑) 황(黃) 등 오방색 기치들도 있었다. 기폭 가장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지네발 같은 천으로 치장돼 있었다.
이윽고 제일이 다가왔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릴 무렵 말랭이에 모인 주민들은 내 방의 풍물들을 꺼내 현장에서 풍물패를 구성했다. 원증산 농악의 기량은 근동에서 다 알아줄 만큼 정평을 얻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횃불을 들고 있었다. 동민들의 얼굴이 횃불에 어리어 얼룽얼룽하였다. 날씨가 무척 추웠고, 허연 입김이 훌훌 날아다녔다. 참가자들 일행이 말랭이에서 출발했다. 의관을 정제한 제관과 축관을 선두로 풍물패가 그 뒤를 따랐다. 언제나 과묵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상쇄 뒤에서 징을 치고 있었다.
제관 행렬은 금줄을 따라 당산으로 직행했다. 현장에서는 부녀자들 몇이 딴솥에 불을 지펴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장정들은 물지게를 지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 그들은 우물을 품고 나서 새로 샘솟은, 제단에 올릴 가장 청결한 정화수는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제사 전후 산제당에서 쓰고 버릴 허드렛물까지 져 날랐다. 부녀자들은 시루나 솥에 안칠 쌀을 비롯하여 제기와 각종 그릇을 씻을 때에도 방금 길어온 물만 사용했다.
시루에서 푸짐한 김이 무럭무럭 올랐다. 소두방이 들썩거리던 솥에서는 음식에 뜸이 돌았다. 풍물패가 풍장을 멈추었고, 제관이 산제당 제기에 제물 진설을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추위를 견디느라 으들으들 떨면서도 숙연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윤씨가 독축할 때에는 왕소나무 가지들이 쉬익쉬익 스산한 바람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소지 올리는 순서였다. 제관이 마을의 번영과 태평을 발원하는 동민 전체의 대동소지(大洞燒紙)를 올린 다음 각 가정의 소지를 한꺼번에 모둠으로 불살랐다. 한지가 호르륵호르륵 타올랐고, 불꽃이 검은 꼬리를 흘리며 휘늘어진 왕소나무 가지 위로 휙휙 사라지고 있었다. 풍물패가 다시 풍물을 두들기기 시작할 때는 호롱불까지 흥겨워 추썩추썩 춤을 추고 있었다.
참가자 전원은 한마음 한뜻으로 산신제에 몰입했다가 첫닭이 울 때 풍물패를 앞세우고 당산에서 내려왔다. 새털 같은 눈발이 흩날리면서 매서운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동민들은 홍 구장 집에 당도하여 화톳불을 피워 놓고 왁자지껄 시끌벅적 웃고 떠들면서 산신제 지낸 음식으로 음복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음식은 세대별로 한 몫 한 몫 나누어 공정하게 배분했다.
마을 공동체의 산신제와는 별도로 윤현중씨네와 강도현씨네처럼 몇몇 넉넉한 집에서는 ‘마짐시루’를 가외로 진상했다. 마짐시루란 산신제를 지내는 날 각 가정에서 산제당을 향해 추가적으로 올리는 개인별 떡시루를 의미했다. 마짐시루의 떡도 동민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원증산 주민들은 바야흐로 산신제가 진행되는 동안 남녀노소 전원이 혼연일체로 똘똘 뭉쳐 있었다. 어디에서 그런 결속력이 나오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개인이 아닌, 마을 공동체의 위력이 피부로 느껴졌다. 인간은 역시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집단을 이루어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었다.
자고로 원증산의 청장년들은 어르신들을 깍듯이 공경했고,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대로 젊은이들을 당신네 살붙이처럼 아꼈다. 매일 아침 어른들을 대할 때의 첫 문안 인사도 판에 박힌 듯 고정돼 있었다. 손아랫사람이 몸을 낮추고 고개 숙이며 “진지 잡수셨슈?” 하고 여쭈면 어른 쪽에서는 “어흠, 먹었어. 자네는 밥 먹었는감?”하고 화답했다. 그 수인사는 산수 구구단보다도 훨씬 더 앞자리를 차지하는 불변의 기본 공식이었다.
가난은 어쩌면 단군 이래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제때 밥을 못 먹고 굶주렸으면 끼니를 주제로 한 인사말이 가장 우선적으로 통용되었을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렇듯 수인사를 통해서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웃이 이웃을 보듬고 챙기는 따뜻한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대여섯 살 안팎의 연배들끼리는 호형호제하면서 절친하게 지냈다. 부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내간이면 당연히 촌수와 항렬에 따른 호칭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타성끼리는 나이에 따라 형님 동생 하면서 소통했다. 어떻게 보면 동민들 모두가 한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어느 날 갑자기 외지의 왈패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인화에 금이 가고 공기가 급속도로 혼탁해지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5학년 새 학기 때였다. 아직 바람 끝이 차가웠다. 그날도 나는 당산과 광대골 사이의 샛길로 들어선 뒤 조금이라도 추위를 달래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헐레벌떡 서낭당 고개를 지나 십자거리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학교로 치달았다. 교문으로 들어설 때에는 손등에서 촉촉한 땀이 배어나올 만큼 온몸이 훈훈해졌다. 교실에 들어가 책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숨고르기를 한 뒤 조회가 열리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교감 선생님의 구령과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학년별 학급별로 조회 대형을 형성했다. 기준! 앞으로 나란히, 좌우로 나란히… 앉아! 일어서! 열중쉬어! 전체 차렷! 우리가 질서 정연하게 정렬을 마치자 지난해 연말 새로 부임하신 교장 선생님께서 단상으로 올라 훈화를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 중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별로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꼭 필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굿이나 보고 떡 얻어먹자는 듯이 구경만 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고, 우리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나쁜 사람이라면 필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학교 학생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온 나는 잡기장 한 귀퉁이에 답안지 작성하듯 ‘① 꼭 필요한 사람, ②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③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필기했다. 연필심이 흐릿해서 침을 발라가며 꾹꾹 눌러 글씨를 썼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사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사람 됨됨이와 쓰임새에 관한 담론으로 여러 책에도 나와 있었다.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고,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씀을 해주신 분이 교장 선생님인 데다 때가 조회 때이고 장소가 학교 교정이었던 만큼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에 박혔다.
맞는 말씀이었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우리 동네 주민들 중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더 나아가 꼭 필요한 사람 중에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 중에는 아예 퇴출되어야 할 사람까지 있었다.
가령 홍사철씨와 윤현중씨가 없어서는 안 될 분들이라면, 우리 (큰)아버지 형제분과 강도현씨도 이웃을 위해 꼭 필요한 어른들이었다. 홍씨는 당신 개인의 일보다도 불철주야 동네를 위해 헌신 봉사했으며, 윤씨는 남모르게 음덕을 베풀어 만인의 귀감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강도현씨는 탁월한 침술로 누군가가 병이 났다 하면 즉석에서 고쳐 주었다. 나도 급체했을 때 그 어른의 침을 맞고 고통으로부터 회복한 적이 있었다.
양가 (큰)아버지와 친가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동네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손기술의 명장인 아버지는 동네 석축을 도맡았고, 해마다 산제당 지붕을 새로 해 일 때 이엉과 용구새를 엮었다. 나머지 절대다수는 대체로 무해 무덕한, 그러면서도 남에게 큰 폐를 끼치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선량한 민초들이었다.
본래 빛이 밝으면 어둠 또한 짙은 법이었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도덕군자들의 뒷전에는 자나 깨나 짙은 어둠을 만들어 내는 악덕 파괴 분자들이 있었다. 야바위꾼 최씨가 별로 필요치 않은 저질이라면, 무턱대고 ‘묻지 마 범행’까지 자행하는 박 서방과 악명 높은 노름꾼 마도팔이야말로 백해무익한 불한당 중의 불한당이었다.
박 서방은 논산 은진인가 어디에서 머슴을 살다가 식솔들 거느리고 처가살이 들어온 작자였다. 인상이 험악했다. 그가 이사 온 뒤 동네에서 쌀이며 보리며 콩이며 닭이라든가 이것저것 도둑맞는 일이 빈번해졌다. 인근 다른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유독 우리 동네에서만 그런 도난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동민들은 어느 놈 소행인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후환이 두려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고 쉬쉬할 따름이었다. 동네에서 뭔가 도둑을 맞았다 하면 마땅히 손버릇 고약하고 행실 나쁜 박 서방이 단연 용의자 우선순위로 떠올랐다. 그 자신 시도 때도 없이 못된 짓을 많이 하는 터라 합리적 의심을 피할 길 없었다.
시거든 떫지나 말지 그는 가끔 동네 회의 때 나타나 마을 일에 동참하는 척 어쩌구저쩌구 한마디씩 제법 희떠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참 가관이었다. 제 딴에는 언제든지 동네를 위해 뭔가 공헌을 할 용의가 있다고 떠벌였다. 하지만 남들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말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만큼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나 할까, 그의 아들 녀석 또한 제 애비를 닮아 싸가지가 없었다. 봄날 새 둥지에서 새알을 꺼내 잔인하게 깨뜨리는 것은 보통이었고, 허약해 보이는 아이들만을 골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아직 미성년이어서 그게 얼마나 큰 죄업인가를 잘 모른다 해도 타고난 본성 자체가 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딸년도 별종이었다. 걔는 살쾡이보다도 더 사나웠다. 다른 집 아이들과 말다툼을 하다가 이빨로 얼굴이나 손등을 물어뜯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 집 남매는 툭탁 하면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질렀고, 걔들 남매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혀를 내두르면서 넌더리를 냈다.
본래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그 반면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되지 못한 똥 덩어리는 똥구멍에서 나오기도 전에 꼬부라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 집 애새끼들이 바로 그 모양 그 꼴이었다. 걔들은 아예 밖으로 내놓은, 두엄자리 쓰레기만도 못한 후레자식들이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씨는 속일 수가 없었다.
동네에 빈집이 한 채 방치돼 있었다. 윤현중씨의 먼 친척이 공주로 이사 가면서 비워둔 집이었다. 마당에서 돋아난 풀이 추녀 끝까지 웃자라 늑대가 새끼 칠 지경이었다. 회색으로 썩어가는 초가지붕에는 움푹움푹 물고랑이 나 있었다. 곧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은 흉물이었다.
박 서방이 마도팔에게 폐가나 다름없는 그 집을 소개했고, 마도팔은 쌀 서너 가마 값으로 소유권을 넘겨받은 뒤 마당이다 지붕이다 뭐다 여기저기 대충 개수하고 나서 이사 와 입주했다. 악질이 또 다른 동료 악질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박 서방네 집과 마도팔네 집은 대각선으로 삐따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털북숭이 마도팔은 본래 천안에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논밭이며 뭐며 재산깨나 가지고 그런대로 밥술이나 먹었는데 노름으로 다 날리고 패가망신한 백수건달이었다. 그는 알거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노름판에서는 자타가 다 알아주는 타짜인지라 그의 배후에는 뒷돈을 대주고 딴 돈을 나눠먹는 물주들이 있었다.
마도팔은 낯가죽이 두꺼웠다. 그의 사전에는 애당초 인간의 도리니 뭐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못된 짓을 하다가 들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안면에다 철판을 깔고는 동네 안팎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전형적인 파렴치한이었다. 비위 또한 얼마나 좋은지 노래기 회쳐 먹고도 남을 무뢰배였다.
그의 자식들 또한 박 서방네 애새끼들처럼 개차반이었다. 그 집 딸년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연락조차 두절되었고, 아들 녀석은 책가방을 둘러메고 학교 가는 척하다가 새뱅이나 사기장골쯤 중도에서 박 서방 아들놈과 어울려 땡땡이치는 날이 더 많았다. 사람 되기는 영 글러먹은, 대가리 피도 마르기 전에 싹수가 노란 녀석들이었다. 박 서방도 그렇고 마도팔도 그렇고 자식 농사를 초장부터 사그리 조져버린 것이었다.
박 서방이 그러하듯 마도팔도 가끔 동네 회의에 얼굴을 내밀고 따따부따 말도 안 되는 잡설을 늘어놓았다. 제 자식 하나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동민들은 그의 말을 염병에 까마귀 짖는 소리쯤으로 간주했다. 결국 그들의 궤변과 억지는 씨도 먹히지 않았고, 토박이들은 박 서방과 그를 싸잡아 똥 친 막대기 정도로 취급했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그들은 동네에 무슨 현안이 떠오를 때마다 한 통속으로 합작하여 사사건건 따따부따 트집 잡고 까탈 부리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했다. 그들의 농간으로 말미암아 조상 전래의 마을 기풍이 부쩍 혼탁해지고 있었다.
두 놈 모두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구르는 돌이 박힌 돌 뽑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오랜 세월 원증산을 지키며 살아온 근엄한 터줏대감들 앞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분별이 없는, 말하자면 동서남북이나 대소변조차 못 가리는 놈들이었다.
폐일언하고 그들은 막말과 질시와 불화와 오만불손과 발목잡기의 화신이었다. 어쩌다 남의 동네에 비집고 끼어들었으면 몸을 낮추어 조신하게 지내도 인심을 얻을까 말까한 마당인데 그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물색없이 짓까불었다. 나이까지 어슷비슷한 두 놈은 서로 배알이 잘 맞아 짝짜꿍 단짝으로 지내고 있었다. 박 서방의 전공이 절도이고, 마도팔의 주특기가 도박인 점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도둑놈과 노름꾼의 절묘한 조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침내 봄이 오고 있었다. 나는 신작로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 말랭이에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들과 마주쳤다. 거기, 쥐엄나무 아래 박 서방과 마도팔이 마주보고 서서 뭐라 숙덕거리고 있었다. 마도팔은 마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산적처럼 봉두난발인 데다 구레나룻이며 콧수염과 턱수염까지 더부룩해서 여간 볼썽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마도팔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화투 섰다판이 떠올랐다. 나는 언젠가 동네 초상집에서 어른들이 화투장으로 섰다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마도팔이 노름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를 보면 저절로 섰다판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는 척 마는 척 거의 건성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유?”
그들 역시 처음에는 나를 본 척 만 척 했다. 보아하니 그들은 뭔가 좋지 않은 음모를 꾸미는 듯했고, 마도팔은 노름하느라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 약간은 초췌해 보였다. 얼굴에 혈색이 없고 거무튀튀하였다. 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내게 말했다.
“잘 지냈냐? 윤복아, 느이 큰아부지 얼마 전 십자거리에서 술 마시더라.”
그 순간 피가 거꾸로 확 치솟았다. ‘느이’는 ‘너의(네)’를, ‘큰아부지’는 ‘(큰)아버지’를 일컫는 말이었다. 내가 큰집으로 출계한 것은 세 살 때의 일로서 박 서방이나 마도팔이 우리 동네로 이사 오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들은 내 입양 과정을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화상들이었다.
나는 양가의 (큰)아버지 내외분을 지칭할 때 ‘큰’ 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친가의 부모님을 호칭할 때에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는 (큰)아버지도 아버지요, 아버지도 아버지요, (큰)어머니도 어머니요, 어머니도 어머니였다. 그렇건만 그는 쥐뿔도 모르면서 어깨너머 귀동냥으로 뭘 좀 안다는 듯이 ‘큰’ 자에 힘을 주어 주접을 떨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작자의 주둥아리에서 튀어나온, 얼마 전 (큰)아버지께서 술 마시던 상황 언질도 내게는 결코 유쾌한 입놀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낯짝에 가래침이라도 탁 뱉어 주고 싶었지만 꼰대들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호기심 많은 나는 약간 떨어져서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박 서방이 마도팔에게 말했다.
“머리가 겁나게 기네. 이발 좀 해야겄어.”
“아직은 안 돼. 우리 기술자들은 이발을 함부로 하지 않는당께.”
마도팔이 씨익 웃었다. 그가 말하는 ‘기술자들’이란 전문적인 노름꾼들을 의미했다. 나는 암호 해독하듯 그의 표정과 ‘우리’와 ‘기술자들’을 종합하여 ‘기술자들’이 곧 노름꾼들을 뜻하는 은어라는 것을 단박 알아차렸다. 하지만 머저리보다도 더 아둔한 박 서방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박 서방이 마도팔에게 되물었다.
“기술자?”
“허허… 자네가 내 말을 못 알아듣네그려. 아직도 눈치 못 챘나?”
그러면서 마도팔은 검지 위에 엄지를 얹고 밑으로 끌어내리는, 즉 섰다판에서 화투장을 훑어 내리며 끗발 재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내가 알기로 노름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손가락 놀림으로 볼 때 마도팔은 아마도 섰다 기술자인 모양이었다. 박 서방이 말했다.
“아, 그거… 인자 알었네.”
“우리 기술자들은 거 뭐시냐… 수염과 손톱도 안 깎는걸. 내 몸에서 뭔가가 새어나가면 끗발이 안 스고 판돈도 빠져나가거든.”
‘스고’는 ‘서고’를 일컫는 말이었다. 박 서방과 마도팔은 자기들끼리 키들거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노름꾼들의 징크스랄까 금기가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그러나 소위 노름판 끗발이라는 것이 도대체 두발 수염 손톱 따위와 무슨 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들만의 미신인 모양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집 뒤꼍에 만발했던 개나리꽃이 하나 둘 지면서 가지마다 푸른 잎이 피어나 무성하게 우거지고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워낙 가물어 한낮이 되면 이파리가 더운 물에 푹 삶은 나물처럼 축축 처져 늘어지는 것이었다. 다른 초목들도 수분 부족으로 맥을 못 추고 있었다. 한낮에는 시루봉에서 날아온 송화가루가 허공 속에 뿌옇게 떠서 안개처럼 이리저리 유영하고 있었다.
농번기에 들어와 밭일을 거의 다 마쳤지만, 논농사는 하루하루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뭄이 장기화되는 바람에 망종(芒種) 하지(夏至)를 지나 소서(小暑)가 가까워지도록 모내기를 할 수가 없었다. 라디오 일기예보에도 비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십자거리에는 부여군청에서 내건 ‘우리 다함께 한해를 극복하자’는 플래카드가 축 늘어져 있었다.
큰일이었다.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쩌걱쩌걱 갈라지고 못자리판에서는 껑충하게 키만 웃자란 모가 시들삐들 뒤틀리면서 말라 가고 있었다. 연일 땡볕이 쨍쨍 내리쬐어 머리가 벗겨질 지경이었다. 앞냇갈 뒷냇갈이 모두 바닥을 드러냈다. 가뭄에 폐사한 물고기들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관개 수리 시설이 미비했던 그때 그 시절 농민들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요때나 조때나 비가 내려주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농심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일부 농민들은 비를 기다리다 못해 논에 대체 작물로 콩을 대파했지만, 푸르러야 할 콩잎마저 누렇게 말라비틀어지고 있었다. 윗집으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큰)아버지가 말했다.
“날이 너무 가물어 큰일이구먼. 며칠 있으믄 소서인디 이러다가 모를 못 심으면 어떡하나.”
(큰)아버지에게는 농사지을 농토가 없었고,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날이 가물든 비가 내리든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반면 아버지는 논농사를 엿 마지기 남짓 짓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당신 아우뿐만 아니라 다른 농민들의 농사까지를 통틀어 염려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증말 큰일이랑께유. 지우제라두 지내야 할라나 참…”
‘증말’은 정말, ‘지우제’는 기우제를 일컫는 우리 고장 표현이었다. 그 이튿날 홍 구장이 마을 회의를 열어 한해 극복 대책을 공론에 부쳤다. 가뭄을 걱정하는 탄식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묘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주민들의 중론이 기우제를 지내자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때 박 서방과 마도팔이 중뿔나게 불거져 나와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마도팔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지우제는 무슨 얼어 죽을 지우제란 말요? 그건 미신이오. 그 따위 짓거리를 한다고 해서 비가 내릴 것 같수?”
“옳소! 도팔이 말대로 뭐하러 그런 쓰잘데기없는 짓을 한단 말이오?”
박 서방이 이죽이죽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서로 죽이 잘 맞았다. 마도팔이 발언하면 박 서방이 편들었고, 박 서방이 입을 놀리면 마도팔이 역성들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자기들 마음대로 떠들었다. 그들은 초지일관 미신 타파를 부르짖으면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박 서방과 도팔이는 개갈 안 나는 소리 그만하게. 계속 똑같은 소리를 해봤자 입만 아플 뿐잉께 조용히 하라 이 말이여.”
‘개갈’은 우리 고장에서 자주 쓰는 말이었다. 개갈이 났다고 하면 하려던 일이 시원하게 풀린 것을 뜻하지만, 개갈이 안 난다고 하면 언행 따위가 섞갈리거나 졸가리가 안 맞아 종잡을 수 없을 때 또는 문제가 안 풀려 해법이 마련되지 않을 때를 의미했다. 마도팔이 말했다.
“개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주선이 달나라를 가는 마당인디 아직도 미신을 믿어? 미신은 뿌리를 뽑아야 한당께.”
그는 바득바득 우기며 핏대를 올렸다. 언어도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미신 타파를 외칠 수 있어도 마도팔이야말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장본인이었다. 그 자신 노름판 끗발이 떨어질까 봐 두발 수염 손톱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미신에 흠뻑 사로잡힌 미신의 화신이 미신 타파를 외치고 나서다니 이건 뭐 자가당착도 보통 자가당착이 아니었다.
기가 막혔다. 동민들은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장시간 토론을 거쳐 일단 소서까지 기다려보다가 그때까지도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 대서 이전에 시루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론을 도출했다. 소서는 7월 6일, 대서는 7월 22일이었다. 음력으로는 소서가 6월 초닷새, 대서가 6월 스무하룻날이었다.
대서 하루 전날인 7월 21일, 음력으로 6월 스무날은 초복이었다. 옛 어른들이 이르기를, 벼 줄기의 세 마디는 초복 중복 말복 등 복날마다 한 마디씩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못자리판 모에서 벼 마디가 생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이앙을 앞당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모가 자라면 자랄수록 모내기로 옮겨 심은 뒤 뿌리를 내리고 생장할 때 몸살이 심할 것이었다.
원래 소서가 지나면 새각시도 모를 심는 법이었다. 소서 모는 지나가는 행인까지 달려든다 했고, 7월 늦모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심어 주고 간다고 했다. 통상 소서 전에 모내기를 마쳐야 하므로 신분을 따지지 말고 모두 힘을 합쳐 모내기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달리 해석하자면 농사 일정이 그만큼 급박하다는 뜻이었다.
소서가 지났다. 여전히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진부진 초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동민들은 제헌절 다음날인 7월 18일 기우제를 지내기로 확정했다. 그날은 논산 장날이었다.
산신제와 마찬가지로 기우제에도 필히 준수해야 할 예법과 격식이 있었다. 이번에는 윤현중씨를 제관으로, 홍사철씨를 축관으로 내정했다. 산신제 때의 역할을 맞바꾼 셈이었다. 모든 동민들이 부정 탈 일을 삼갔으며, 기우제 비용 마련을 위해 집집마다 쌀 한 되씩 추렴했다. 어떤 집에서는 두 되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박 서방과 마도팔은 끝까지 추렴을 거부하면서 어떻게 하면 기우제를 못 지내게 방해할 것인가 골몰하고 있었다. 그들의 내면에는 무서운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녀자들은 기우제 사흘 전부터 매일 저녁때 키[箕]를 가지고 말랭이에 집결했다. 키가 식구 수보다 모자라 키를 지참할 수 없는 사람은 키 대신 병에 솔가지를 꽂아들고 나왔다. 그들은 곧 풍장을 치며 십자거리 우물로 가서 키에 물을 받았다. 병을 가진 사람들은 병에 물을 담았다.
이렇게 남의 동네에 가서 물 받아 오는 의식을 ‘물 달아 온다’고 표현했다. 십자거리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대개 우리 동네로 와서 물을 달아 갔다. 키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면 마치 비가 내리듯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지라 단비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옛날부터 그런 연극을 꾸며 온 것이었다. 물을 달아 가지고 발길을 돌릴 때에도 역시 풍장을 이어갔다.
말랭이로 되돌아온 부녀자들은 시루봉으로 올라가 키를 까부르며 “비 온다!” “비 온다!”를 연호했다. 물병을 가진 사람들은 물을 땅에 쏟으면서 “비 온다!” “비 온다!”고 소리쳤다. 구전에 이르기를, 여자들이 큰 소리로 싸우면 비가 온다고 했다. 부녀자들은 그 속설을 좇아 이른바 날궂이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기우제 당일이었다. 윤씨 부인과 홍 구장 부인은 아침 일찍 논산 장에 가서 조율이시(棗栗梨柿) 등 각종 제수를 구입해 왔다. 저녁 때 우리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가장 먼저 시루봉으로 올라가 딴솥을 걸어놓고는 과일이나 건어물이 아닌, 굽거나 찌거나 삶거나 볶거나 지지거나 끓이거나 익혀야 하는 제사 음식을 마련했다. 푹푹 찌는 날씨에 불을 피워 놓고 일을 하다 보니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릴 무렵 말랭이 쥐엄나무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부녀자들은 제관 윤씨와 축관 홍 구장을 모시고 풍물패를 따라 시루봉으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해가 져서 밤이 되었는데도 온종일 햇볕에 달구어진 대지가 후끈후끈하였다.
제관이 온 정성 다해 풍성한 제물을 진설했다. 비를 기다리는 동민들의 간절한 염원. 제관이 절을 올리고 축관이 독축하는 동안 참가자 일동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독축이 끝나자 부녀자 서너 사람이 짚단을 세워놓고 불을 질렀다. 그 의식은 화기가 올라가야 비가 내린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큰)어머니가 부녀자들 대표로 한지에 불을 붙여 천신소지(天神燒紙)를 올리면서 무당처럼 “그저 비를 억수같이 퍼부어 주시어 풍년 들게 해주소서” 하고 축수했다. 그러자 다른 부녀자들도 차례차례 소지를 올렸다. 불붙은 한지 조각들이 산지사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사라졌다.
치성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음복을 시작했다. 늘 배고픔에 시달리던 동민들에게는 제물이야말로 자주 대하기 어려운 색다른 음식이었다. (큰)어머니와 어머니는 음복하고 남은 음식을 가구별로 몫몫이 골고루 나눈 뒤 누르딩딩한 ‘회푸대’ 종이에 싸서 돌렸다. 각 가정에 전달하는 봉송이었다.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꼭 사흘 뒤 우연인지 필연인지 기적처럼 장대비가 쏟아졌다. 물꼬마다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사흘간 농가 일손 돕기 특별 휴업을 실시했다. 풍족한 강우량으로 극심했던 한해가 일거에 해갈되자 주민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며 용보들과 구례들 논으로 달려들었고, 쟁기질과 써레질과 쇠스랑질로 논바닥을 고르면서 키만 웃자란 늦모의 우듬지를 싹둑싹둑 잘라내고 모 포기를 심었다.
논바닥에 모를 쪽쪽 꽂는 손가락이 날렵했고, 못줄을 잡는 사람이나 모쟁이들까지 모두 신바람이 나서 흥겹게 일하고 있었다. 보슬보슬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른들 중에는 도롱이를 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날비를 맞으며 흙탕물이 흥건한 논바닥에 늦모를 꽂아대고 있었다.
친가 모내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 그 다음날 나는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따라 태조산 아래 전진바위 모퉁이에 있는 윤구병씨네 자갈논으로 갔다. 전진바위 논에는 자갈이 워낙 많고 바닥이 단단하여 손가락이 아닌 호미로 구덩이를 파고는 고추나 가지 모종 식재하듯 늦모를 심었다.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지만, (큰)아버지 내외분과 나는 윤씨네 논이 곧 우리 논이라 생각하면서 온 정성 다해 이틀 동안 자갈논 여러 배미를 늦모로 채웠고, 이렇게 모내기를 함으로써 그해 텃도지를 다 해결하는 한편 자투리 품삯까지 받았다. 즐겁고 행복했다.
단비가 내린 뒤 산야가 달라졌다. 흙빛이었던 원증산 들판이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은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신하듯 모는 곧 뿌리를 내리고 땅내를 맡으면서 벼 포기로 거듭나 우쭐우쭐 거무룩하게 자라 올랐다.
그 당시에는 통상 모를 내고 보름쯤 후 호미로 논을 맨 다음 대략 열흘 내지 보름 간격으로 두세 차례 더 맸다. 김매기는 논밭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논의 풀을 뽑는 것은 논매기였고, 밭의 풀을 뽑는 것은 밭매기였다. 논매기의 경우 맨 처음 매는 것을 초벌, 두 번째 매는 것을 두벌, 세 번째 매는 것을 세벌이라 했다. 네 번째 맨 마지막으로 매는 것을 망시라 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흔히 초벌을 ‘아시’라 했고, 망시를 ‘만물’이라고 했다. 초벌과 두벌은 호미로 매지만, 세벌과 망시는 호미 대신 손으로 더듬기 때문에 ‘맨다’보다 더 적절한 ‘훔친다’는 표현을 썼다. 주민들은 두레를 조직해 집단적으로 논을 맸고, 논매기를 다 마친 다음에는 통돼지를 삶아 놓고 ‘꼼뱅이’를 먹었다.
두레는 농민들의 공동 협업 조직이었고, 꼼뱅이는 한여름 논매기를 마치고 나서 노동의 피로와 시름을 떨쳐 내기 위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마을 전체의 대규모 축제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이날을 ‘꼼뱅이 먹는 날’이라고 일컬었다. 꼼뱅이 먹는 날 동민들은 말랭이에 큰 농기를 세워놓고 꾸다당 땅땅 꾸당 꾸당 꾸다당 땅땅 신바람나게 풍장을 쳐서 한껏 흥을 돋우었다.
원증산에서 꼼뱅이를 먹을 때에는 십자거리 주민들도 자기 동네 농기를 앞세우고 와서 열두 발 상모를 돌리며 함께 어울렸다. 두 마을이 합세하여 넋이 쑥 빠지도록 화끈하게 두들기는 당대 최고의 풍장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에는 그야말로 덩실 덩실 더덩실 어깨춤이 절로 났다. 그해 농사는 사상 최고의 대풍이었다.
어느덧 겨울이 왔다. 방학을 맞이한 나는 그날도 초저녁부터 내 방에 들어앉아 공부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메 이게 웬일일까, 뒷간에 다녀오던 (큰)아버지가 느닷없이 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윤복아, 그 징 얼릉 이리 가져와라!”
“징유?”
“그려. 당산에 불났다! 빨리 줘!”
“여깄어유.”
나는 얼른 징과 징채를 꺼내 드렸고, (큰)아버지는 징을 치며 허둥지둥 말랭이로 뛰어 나갔다. 지잉, 지잉, 지잉… 당신께서 마을 한복판을 향해 연신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불이야! 당산! 당산!”
(큰)아버지는 계속 징채로 징을 쳤다. 지잉, 지잉, 지잉… 나도 덩달아 말랭이로 뛰어 올라가 (큰)아버지를 응원했다. 산제당이 활활 붙타고 있었다. 시뻘건 화염이 뭉클뭉클 하늘로 솟구치며 널름널름 어둠을 베어 물고 있었다. 긴급 상황에 놀란 동민들이 일제히 집에서 쏟아져 나왔다.
(큰)아버지와 나는 숨을 몰아쉬며 줄곧 “당산! 당산!”을 외쳤고, 동민들도 “당산! 당산!”을 복창으로 전파하면서 물통이나 양동이에 물을 담아 들고 득달같이 화재 현장으로 들이닥쳤다. (큰)어머니도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당산으로 질주했다. 장정들은 물지게를 짊어졌고, 쇠스랑이나 도리깨 같은 농기구를 챙겨들고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박 서방네와 마도팔네 떨거지들을 제외한 동민들이 노인들부터 어린이들까지 너도나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벌 떼처럼 화재 현장으로 총출동했다. 하여간 원증산 토박이들의 단결력은 세계 최고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큰)아버지와 내가 당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불길이 잡히고 자잘한 잔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산제당은 이미 전소돼 있었다. 바싹 건조돼 있던 볏짚 지붕은 재가 되었고, 출입문 문짝은 새까만 숯이 되어 있었다. 이엉과 용구새가 모두 아버지 작품이어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물세례를 받아 물렁해진 토담 일부가 스르르 무너져 내리자 그 위에 건성으로 걸쳐 있던 시커먼 서까래가 우지끈 거꾸러지고 있었다. 흠뻑 젖은 토담 흙덩이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불꽃의 습격을 받은 왕소나무 가지에서 매캐한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그나마 산불을 막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화재 원인은 명백한 방화였다. 현행범인 박 서방과 마도팔은 보란듯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내 예측이 적중했다. 그들은 결코 우리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버러지만도 못한 말종들이었다. 홍 구장과 윤현중씨가 노발대발 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질타하고 있었다. 홍 구장이 그들에게 호통쳤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마도팔이 태연자약하게 빈들거리면서 대꾸했다.
“미신이잖어유, 미신!”
“야, 이놈아. 입 닥치지 못할까. 뭐? 미신? 어허, 이런 정신 나간 놈이 있나. 산제당이 미신인가? 여기 있는 그릇이 미신인가? 네놈들이 우리 동네 역사와 전통을 알어? 네놈들 말대루 미신이라구 치자. 안 믿으면 그만이지 산제당에 무슨 잘못이 있다구 불을 질러? 천벌을 받아 마땅할 불상놈들 같으니라구…”
그 말을 받아 박 서방이 삿대질을 하며 대들었다.
“미신을 없애는 게 뭐가 잘못이우?”
“시끄러! 이 개새끼야. 개소리 그만혀.”
누군가가 박 서방에게 냅다 욕설을 퍼부었다. 잿더미에서 탄내가 등천하는 가운데 동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어떤 사람은 그들을 당장 지서에 고발하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장정들 몇이 멱살을 거머쥐려고 나서자 박 서방과 마도팔도 주먹을 들먹들먹하며 난투극을 불사할 기세로 살기등등했다.
주민들의 격앙된 감정이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처럼 서슬 시퍼런 반목과 갈등이 나타난 것은 우리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이었다. 일찍이 6·25전쟁 때 인공 치하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극한 대립이었다. 박 서방과 마도팔은 눈에 쌍심지를 박은 채 지랄 발광을 하고 있었다.
일촉즉발 건곤일척의 아슬아슬한, 너 죽고 나 죽는 막장 사생결단이 폭발하기 직전 홍 구장과 윤현중씨가 가까스로 장정들을 진정시켰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도 격노할 대로 격노하여 두 시러베 잡놈들을 호되게 꾸짖었지만, 극악무도한 개망나니들은 도리어 식식거리면서 꽝꽝 큰소리를 쳤다. 시루봉에서 부엉부엉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그 이튿날 오전 홍 구장 집에서 마을 회의가 열렸다. 동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박 서방과 마도팔을 와글와글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범법자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마을의 위상과 동민들의 체면을 고려한 대승적 차원에서 형사 고발만은 잠시 멈추기로 중지를 모았다. 산제당 복원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끝에 당분간 보류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동민들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당산으로 올라가 화재 현장을 말끔히 치웠다. 불타다 만 잔해들을 완전히 소각했고, 얼어붙은 토담 흙뭉치를 삽이나 괭이로 잘게 부수어 평지에 깔았다. 누렇고 검게 그을린 왕소나무 가지들도 손질했다. 날카로운 사금파리 파편들을 긁어모아 땅속 깊이 파묻었고, 토담에서 나온 돌멩이를 한군데로 모았으며, 산제당 안에 있던 물건 중 파손되지 않은 기명(器皿)만 골라 홍 구장 집으로 가져왔다. 사발 대접 접시 시루 옹기솥 등 거의 모든 그릇들이 거뭇거뭇 검댕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방화 사건의 후유증과 파장은 간단치 않았다. 마을 인심이 급격히 사나워졌고, 오죽하면 두 악마 꼴 보기 싫어 타동네로 이사 가야겠다는 주민들까지 나왔다. 선현들이 말하기를,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다. 동민의 일원이기를 포기한 박 서방과 마도팔은 이웃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오죽하면 모두가 그들을 외면하면서 다시는 인간으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
박 서방과 마도팔은 몽둥이 뜸질이 아닌, 여론의 뭇매에다 눈총의 집중 사격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우리 동네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공은 닦은 데로 가고 죄는 지은 데로 가게 마련이었다. 박 서방이 먼저 가솔 나부랭이들을 이끌고 야반도주하듯 대전으로 떠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쯤 뒤에는 마도팔이 제 피붙이들과 함께 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그러고는 이내 종적을 감추었다. (『한국작가』2024. 가을호)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충남 부여 출생.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제27대), (사)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사)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소설집 『화려한 밀실』『사육제』『겨울 여행』『 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 외 다수, 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폭설』『겨울 무지개』『사랑과 운명』 『계백』『황금의 후예』외 다수, 대통령표창(1987·1995),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28회 국제PEN문학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제61회 한국문학상, 제21회 창조문예문학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