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심 논설위원 기고]
지 나이 지가 먹어 놓고
어느 시대에도 나이 먹는 것은 본인은 물론이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는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물론 기근과 불가피한 자연재해로 예전의 인간의 수명은 지금의 반도 못 되게 짧았다.
그럼에도 장수하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런 사람들조차 나잇값을 못 하면 냉대를 받거나, 심하면 부족에게서 축출되었다. 식량을 축내면서 나이만 먹는 것을 용서할 만큼 넉넉한 마을이나 부족은 없었다.
기로 속이 법제화가 되지는 않았으나 각 나라마다, 마을마다 겉으로 드러나 지 않는 기로 속이 존재했다. 나잇값을 한다는 것은 연륜이 쌓여 생기는 현명함이었다.
그 현명함은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노하우였고, 때로 그것이 부족을 살리고 가족을 위험에서 구했다. 그래서 현명한 노인일수록 젊은이들은 공경했고 받들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노인의 현명함이 필요 없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며, 앞으로 알아야 할 것들도 찾으면 다 알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경험도 전수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시대가 다른 세대의 가치관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간극이 있다. 그러니 노인 공경이나 존중을 말하는 것조차 그들에겐 혐오를 느끼게 하나 보다.
모처럼 좀 먼 길을 다녀오느라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탔는데, 역에서 내려 승강기를 타고 내리자마자 싸움의 현장과 맞부딪혔다. 싸움의 현장이라기 보다 노인과 젊은이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새파란 젊은이가 노인과 싸우고 있었는데, 말끝마다 노인네, 노인네 하는 것이 내 귀에도 거슬렸다. 그러나 아무도 두 사람의 말싸움에 끼어들지 않았고 막 가는 젊은이의 말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채로 지켜보았는데, 젊은이에게 노인이 당하지를 못 했다. 노인은 삿대질까지 하면서 흥분한 상태였으나 젊은이는 오히려 내내 비웃는 듯한 말투로 능글능글했다.
누가 저 어르신을 말렸으면 좋으련만, 저 모욕을 그만 당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생각만 하고 나서지를 못 하고 있는데, 젊은이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고 막 문을 연 승강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무나 놀라운 젊은이의 말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적자면,
"지 나이 지가 먹어 놓고 누구 보고 존대하래? 쓰발놈의 영감 탱구."
아무리 봐도 스물 서넛 밖에 안 되는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에 너무나 놀란 사람은 나뿐이었을까? 이미 문이 닫힌 승강기를 향해 노인은 고래고래 뭐라고 말을 했으나, 이미 허공에 흩어진 낙엽일 뿐이었다. 마치 일가 오라비인 듯 그 모습이 애잔하고 서글퍼서 시장도 지나쳐 오고 말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 세대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던 일을 눈앞에 서 보면서, 그 젊은이의 말이 귀에서 떠나지를 않아 마음이 시끄러웠다.
우리 젊을 때는 하고 말하면 라테라고 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질색한다지만, 정말 우리 젊을 때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 젊은이는 아마 맞아 죽어도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노인이 길 가는 청년에게 시비를 붙여 뺨을 때려도, 반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아버지 같은 노인이 그런 것을 네가 참아야지, 모두 그랬다.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노인이 손자 뻘의 청년에게 수모를 당해도 아무도 개의치 않고 지나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지금까지 곱씹는 것은 그 청년의 말이다. 지 나이 지가 먹어 놓고 누구 보고 존대하랴냐는 그 청년의 말이,과연 옳은 것임을 코 끝이 시큰하도록 깨달으며 내 나이를 돌아 본다.
이 시대에, 이제 겨우 새파란 청춘이 자기 부모에게도 쓰지 않은 존대를 생판 남이 바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 노인이 나이를 먹은 것은 그 노인이 먹은 것이지, 자신과는 전혀 상관도 없건만 공대와 존대를 바라는 것이 기가 막힐 뿐인 젊은이를 대체 뉘가 무슨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까?
나이 든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공맹지도는 전혀 먹혀들 여지가 없다. 배운 바도 없거니와 배웠다 하더라도 이시대의 젊은이들 의 사고로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물건은 백 년이 지나면 엔틱이 되지만, 사람은 접근 금지의 귀신쯤 된다. 그래서 이 시대의 노년들은 반드시 나잇값을 하고 살아야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고 살 수 있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장착해야 할 나잇값은, 어떤 경우에도 공경과 공대를 바라지 말 것이다.
같은 시대를 걸어가는, 단지 단지 좀 앞서고 뒤를 걸어가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행동을 해야 그나마 젊은이들과 살아갈 수 있겠다. 그 젊은이가 나이 먹어 노년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대접을 받을지 정말이지 궁금한 오늘이다.